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리 브란트 (문단 편집) === [[귄터 기욤 사건|기욤 간첩 사건]]과 성추문 === 1차 [[오일 쇼크]]의 충격이 여전하던 1974년 '''[[귄터 기욤 사건|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과 그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이 동독의 간첩]]'''이었던 사실이 드러나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당시 [[서독]]에는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에서 파견한 다량의 [[간첩]]이 사회 각계각층에 깊숙히 침투해 있었음이 통일후 슈타지 재판에서 드러났다. 통일 당시 서독에 최대 30,000명에 이르는 고정간첩과 정보원이 있었다는 추정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동독에 가족이 살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슈타지는 서독의 계층별 인사들을 파악한 후 가족들이 동독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접근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였다고 한다.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스파이]]가 되긴 했지만 타의적인 것이기에 자발적인 스파이들에 비해서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그렇게 해도 망한 건 서독이 아닌 동독이란 게 함정~~] 빌리 브란트 본인도 동독의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브란트는 이를 철저하게 부인했으며, 브란트가 이에 관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 결과 귄터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들 중에 국가 [[안보]]에 심각하게 위해가 될만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욤은 브란트의 개인 [[비서]]였지만 공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높은 사람의 비서라고 해도 국가의 존망을 흔들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하는것은 과거든 현재든 어렵다. 실제로 상당한 정보가 동독으로 흘러들어가기는 했으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특급 정보는 기욤이 구할 수 없었다.] 다만 기욤이 동독에 넘긴 자료에는 브란트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브란트는 자신은 간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총리직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연방범죄청이 기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브란트의 섹스 스캔들, 심한 음주 행각 등이 추가로 드러난 것. 귄터 기욤이 브란트의 섹스 중독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시로 브란트에게 [[매춘부]]를 공급했음이 밝혀졌다. 기욤은 브란트가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에 순방을 나갔을 때나 선거 유세를 위해 지방을 순회할 때도 브란트의 개인적 취향에 맞는 창녀들[* 배우 출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을 엄선해서 브란트의 호텔방이나 총리 전용 열차에 계속 공급했다.[* 입막음 비용은 슈타지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이에 브란트의 소속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브란트의 실추된 이미지로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브란트를 내치고 재무장관인 [[헬무트 슈미트]]를 차기 총리로 내세우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고,[* 하지만 정작 슈미트 본인은 브란트의 사임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리]]직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란트에게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것이라며 사임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한 브란트는 취임 4년여 만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표면적으로 브란트는 기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심한 [[우울증]]으로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워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후임 총리로는 예정대로 슈미트가 취임했다. 어쨌거나 섹스 스캔들이 언론에 본격 이슈화되기 전에 사퇴했기 때문에 일반 독일 국민들은 그가 단지 기욤 간첩 사태 때문에 사퇴한 줄만 알고 섹스 스캔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성중독에 가까웠던 그의 사생활은 퇴임 후 한참이 지나서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